논어

아침에 도를 들으면

어짊 1, 조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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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에는 오래 곱씹게 되는 문장이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도 유난히 세게 들리는 것이 있다.

이인편 여덟 번째 장이다. 여덟 글자로 되어 있고, 읽고 나면 잠시 멈추게 된다.

朝聞道 夕死可矣

조문도 석사가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이인 8)

이 문장은 무엇을 하라고 시키지 않는다. 다만 저울 하나를 꺼내 놓는다.

듣는다는 글자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동사다. 배운다도 아니고 얻는다도 아니고 이룬다도 아니다. 듣는다(聞)이다.

배운다는 말에는 내가 애써 가져오는 움직임이 들어 있다. 듣는다는 말은 다르다. 밖에서 온 것이 나에게 닿는 일이고, 그 순간을 내가 정할 수 없다.

그러니 이 문장이 값을 매긴 것은 오래 쌓아 올린 성취가 아니다. 무언가가 귀에 닿는 그 한순간이다.

한 번 닿기만 해도 그날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다.

도라는 말

도(道)는 길이라는 뜻의 글자다. 사람이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이기도 하고, 세상이 굴러가는 이치이기도 하고, 배워서 닿아야 할 무엇이기도 하다.

이 책은 도를 한 번도 정의하지 않는다. 어짊(인)을 한 단어로 확정하지 않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정의를 내주지 않으니 읽는 사람마다 다른 것을 떠올리게 되는데, 그것이 이 문장이 이천오백 년 동안 인용된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을 들어야 하는지 정해 두지 않았으므로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그 저울을 쓴다.

저녁에 죽어도 좋다

뒤쪽의 가의(可矣)는 좋다, 괜찮다는 뜻이다.

죽어야 한다도 아니고 죽고 싶다도 아니다. 죽어도 상관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명령이 아니라 서술이라는 말이 된다.

그래서 이 문장은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읽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요구가 없는데 저울만 놓여 있기 때문이다.

갈리는 읽기

이 여덟 글자를 두고 읽기가 갈린다.

주자는 도를 사물의 마땅한 이치로 보았다. 그것을 진실로 들으면 살아서는 순하고 죽어서는 편안해 남은 한이 없다는 것이다. 개인이 무엇을 깨닫는 자리로 읽은 셈이다.

다르게 읽는 사람들도 오래 있었다. 도가 세상에 행해진다는 소식을 듣는 것으로 보는 쪽이다. 세상이 바로잡혔다는 말만 들을 수 있다면 그날 죽어도 좋다는 뜻이 된다.

두 번째로 읽으면 문장의 성격이 달라진다.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끝내 보지 못한 세상을 두고 한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이 여러 나라를 돌고도 쓰이지 못했다는 사실이 여기에 걸린다. 그는 자기가 말한 그 소식을 살아서 듣지 못했다.

어느 쪽으로 읽든 남는 것

두 읽기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이 장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쪽이든 저울은 그대로 남는다. 한쪽에 목숨이 올라가 있고, 반대쪽에 무엇을 올릴 수 있느냐는 물음이 남는다.

이 문장이 무거운 이유는 대단한 것을 알라고 요구해서가 아니다. 목숨과 견줄 만한 것을 대 보라고 하는데, 대 보려는 순간 대부분의 사람이 말문이 막히기 때문이다.

왜 이 문장이 앞에 오는가

이 시리즈에서 어짊을 다루는 부는 이 편으로 시작한다. 어짊이 아니라 도를 말한 장인데도 그렇다.

어짊이 무엇인지 묻기 전에, 그런 것을 묻는 일이 그만한 값이 나가는지부터 정해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값이 정해지지 않은 물음은 오래 붙들리지 않는다.

다음 편부터는 어짊이 얼마나 가까운지, 그리고 그렇게 가까운데 왜 아무도 그 이름을 얻지 못했는지를 본다.

오늘, 저울에 올려 볼 것

목숨과 맞바꿀 만한 것이 있느냐는 물음은 너무 커서 대개 그냥 지나가게 된다.

크기를 줄이면 답할 수 있는 물음이 된다. 지난 한 해를 통째로 내주고도 알고 싶었던 것이 있었는가. 한 달이라면 어떤가.

이 문장이 우리에게 무겁게 들리는 이유는 요구가 커서가 아닐 수도 있다. 그 저울에 무엇을 올려 본 적이 오래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침에 들을 수만 있다면 저녁을 내주어도 좋은 것이, 나에게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