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열다섯에서 일흔까지

배움 3, 공자의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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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자기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논어』 스무 편을 다 뒤져도 자기 생애를 정리해 말한 자리는 한 곳뿐이다.

위정편 네 번째 장에서 그는 자기 인생을 여섯 마디로 끊어 놓는다.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오십유오이지우학 삼십이립 사십이불혹 오십이지천명 육십이이순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

나는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섰고, 마흔에 흔들리지 않았고, 쉰에 하늘이 내린 몫을 알았고, 예순에 귀가 순해졌고, 일흔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 (위정 4)

이 한 장에서 나온 말들이 지금도 마흔과 쉰과 예순의 다른 이름으로 쓰인다.

열다섯, 배우기로 한 나이

첫 마디는 배웠다가 아니라 배움에 뜻을 두었다이다. 지(志)는 마음이 어느 쪽을 향해 서는 일을 가리키는 글자라, 여기서 말하는 것은 실력이 아니라 방향이다.

열다섯에 얼마나 알았는지는 이 문장의 관심 밖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공자는 노나라의 몰락한 무사 집안에서 태어났고, 사기는 그가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가난하게 자랐다고 전한다. 스승이 누구였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는 자기를 두고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해 부지런히 찾아다닌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니 열다섯의 뜻이란 좋은 스승 밑에 들어간 일이 아니라,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 그쪽을 보기로 한 일에 가깝다.

서른에 선다는 말

두 번째 마디는 짧다. 서른에 섰다고만 하고 무엇에 섰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주자는 이 자리를 예(禮)에 선 것으로 읽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가 몸에 붙어, 흔들리지 않고 설 수 있게 되었다는 풀이다.

다른 풀이도 오래 있었다. 배움의 기초가 서서 스스로 공부를 끌고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쪽이 하나다. 생계와 자리가 마련되어 남에게 기대지 않게 되었다는 쪽이 또 하나다. 세 풀이 가운데 어느 하나를 골라야만 이 장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자는 서른 무렵부터 제자를 받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마흔, 흔들리지 않는다

세 번째 마디가 불혹(不惑)이다. 혹(惑)은 여러 갈래 앞에서 마음이 어느 쪽으로도 정해지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니 불혹은 더 배울 것이 없어졌다는 말이 아니다. 무엇이 옳은지를 두고 갈팡질팡하는 일이 멎었다는 말이다.

이 마디는 뒷날 마흔의 다른 이름이 되었고, 그러면서 원래 없던 무게가 붙었다. 마흔이 되었는데도 흔들리는 사람은 이 이름 앞에서 자기가 늦었다고 느끼기 쉽다.

그런데 공자의 마흔은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나이였다. 그가 노나라에서 벼슬다운 벼슬을 얻은 것은 쉰을 넘겨서였고, 그마저 몇 해 만에 내려놓고 길을 떠났다.

쉰에 알게 된 몫

네 번째 마디는 지천명(知天命)이다. 하늘이 내린 몫을 알았다는 말인데, 그 몫이 무엇인지는 끝내 나오지 않는다.

천명은 정해진 운명이라는 뜻으로도 읽히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라는 뜻으로도 읽힌다. 앞쪽으로 읽으면 받아들임에 관한 말이 되고, 뒤쪽으로 읽으면 사명에 관한 말이 된다.

공자의 생애를 놓고 보면 두 뜻이 한 자리에서 만난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난 뒤 예순 가까이 되어 길을 떠났고, 어디에서도 자기를 써 줄 자리를 얻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돌아가지 않았다.

알게 된 몫이 그를 편하게 해 주지는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예순의 귀

다섯 번째 마디가 여섯 중에서 가장 풀기 어렵다. 귀가 순해졌다는 말을 어떻게 읽을지를 두고 오래 의견이 갈렸다.

무슨 말을 들어도 거슬리지 않게 되었다는 쪽이 있다. 칭찬에도 비방에도 마음이 출렁이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듣는 즉시 그 말의 뜻을 알게 되었다는 쪽도 있다. 말과 그 말이 나온 자리를 함께 듣게 되었으니, 상대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가 바로 보인다는 풀이다.

두 풀이는 사실 멀지 않다. 왜 그렇게 말하는지를 알면 대개는 덜 거슬린다.

다만 공자가 이 나이에 무엇을 듣고 있었는지는 기억해 둘 만하다. 그는 열네 해 동안 나라를 옮겨 다니며 문전박대와 비웃음을 들었고, 세상을 등진 은자들에게서 부질없는 짓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일흔, 마음대로 해도 넘지 않는다

마지막 마디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다.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가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는 말이다.

앞의 다섯 마디가 무엇을 얻었는지를 말한다면, 이 마디는 애쓰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지켜야 할 선이 밖에 있고 하고 싶은 것이 안에 있는 동안에는 둘 사이에서 늘 힘이 든다. 그 둘이 겹치면 참을 일이 없어진다. 자유롭다는 말과 어긋나지 않는다는 말이 한 문장에 들어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이것은 규범을 이겼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규범이 하고 싶은 것 안으로 들어와 버린 사람의 이야기다.

뒤에서 돌아본 연표

여섯 마디를 나란히 놓으면 잘 정리된 시간표처럼 보인다. 열 살 단위로 끊겨 있고, 뒤로 갈수록 높아지고, 마지막이 완성이다.

그런데 이 말을 한 사람은 이미 일흔을 넘긴 사람이다.

살아갈 사람이 앞을 내다보며 세운 계획이 아니라, 다 살아 본 사람이 뒤를 돌아보며 붙인 이름이라는 뜻이다. 방향이 반대다. 지나온 길을 정리하면 매듭이 보이지만, 걷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매듭이 어디쯤인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여섯 마디는 남의 나이를 재는 자로 쓰기에는 잘 맞지 않는다. 공자 자신도 마흔에 자기가 불혹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늙음이 오는 줄도 모르고

『논어』에는 공자가 자기를 설명한 자리가 하나 더 있다. 섭공이라는 사람이 자로에게 그대의 스승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고, 자로가 답하지 못했다는 이야기 뒤에 붙어 있는 말이다.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

발분망식 낙이망우 부지노지장지

무언가에 힘을 쏟으면 먹는 것을 잊고, 즐거워서 근심을 잊어, 늙음이 오는 줄도 모른다. (술이 19)

나이를 열 살 단위로 끊어 센 사람이 다른 자리에서는 늙음이 오는 줄도 모른다고 말한다.

두 말은 서로를 지우지 않는다. 오히려 한쪽이 다른 쪽의 뜻을 정해 준다. 여섯 마디의 연표는 나이를 세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이를 잊을 만큼 붙들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오늘, 나이에 붙은 이름들

불혹과 지천명과 이순은 지금도 쓰인다. 한 사람이 자기 삶을 돌아보며 붙인 이름이 이천오백 년 뒤에는 모두의 나이표가 되어 있다.

그 자를 대 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늦은 사람이 된다.

마흔에 흔들리고, 쉰에 무엇이 자기 몫인지 모르고, 예순에도 어떤 말은 여전히 거슬린다. 정작 이 문장을 남긴 사람의 마흔과 쉰이 그랬다는 사실은 잘 이야기되지 않는다.

이 장을 시간표로 읽으면 뒤처진 기분만 남는다. 지나온 자리에 이름을 붙여 본 한 사람의 기록으로 읽으면 다른 물음이 생긴다.

나는 지금 무엇에 뜻을 두고 있으며, 그것을 언제부터 그렇게 부를 수 있게 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