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춤추고 물러난 사람

왕 6, 처용

읽는 시간 8분 · 무료 공개

Read in English ↗

학습 진도 0/100%

원문 읽기

신라 마흔아홉째 임금 헌강왕 때 서울은 보기 드물게 넉넉했다.

집과 담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고 초가집이 하나도 없었다고 기록은 적는다. 길에는 음악과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도 사철 순조로웠다.

이 편은 그렇게 좋은 시절의 한복판에서 시작한다.

안개에 갇힌 왕

왕이 개운포로 놀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한낮에 물가에서 쉬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길을 잃었다. 왕이 이상히 여겨 일관에게 물었다. 동해 용의 조화이니 좋은 일을 해서 풀어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왕이 곧 관리에게 명해 용을 위해 그 근처에 절을 세우게 했다. 명이 내려지자마자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흩어져서, 그곳을 구름이 걷힌 포구라 하여 개운포라 부른다.

서울로 따라온 아들

동해 용이 기뻐하며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 앞에 나타났다.

그들은 왕의 덕을 기리며 춤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가운데 아들 하나가 왕을 따라 서울로 들어와 정사를 도왔다. 그 사람의 이름이 처용이다.

왕은 그를 붙잡아 두려고 두 가지를 했다.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주었고 급간이라는 벼슬을 주었다. 바다에서 온 사람을 뭍에 머무르게 하는 방법이 혼인과 자리였다는 뜻이다. 그것이 뒤에 일어날 일의 배경이 된다.

자리에 있던 넷

처용의 아내는 매우 아름다웠다. 역신이 그녀를 흠모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 밤에 그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몰래 자리에 들었다. 처용이 밖에서 놀다가 밤늦게 돌아왔다.

자리에 다리가 넷이었다. 그는 자기 것이 둘이고 나머지 둘은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다.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겠느냐고 했다. 그 말을 노래로 부르면서 춤을 추고 물러났다.

이 노래가 처용가로 전한다. 향찰로 적혀 있어 오늘의 말로 옮기는 결과는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다. 다만 다리 넷을 세는 대목과 마지막 물음은 어느 읽기에서나 같다.

기록은 그가 화를 냈다고 적지 않는다.

문에 붙인 얼굴

그때 역신이 형체를 드러내 처용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자기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잘못을 저질렀는데 공이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격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맹세를 했다. 앞으로는 공의 얼굴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 약속 하나가 이 이야기를 오래 살아남게 했다. 나라 사람들이 문에 처용의 얼굴을 붙이기 시작했다. 나쁜 것을 막고 좋은 일을 맞아들이려는 것이었다. 왕은 돌아와 영취산 동쪽 좋은 자리에 절을 세우고 망해사라 했다.

춤이 알려 준 것

이 조목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몇 장면을 더 붙인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의 신이 나타나 왕 앞에서 춤을 추었지만, 그 춤을 본 사람은 왕뿐이었다. 다른 자리에서도 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다.

기록은 그 춤들이 무엇을 알리러 온 것인지 적어 둔다.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려 주려고 신들이 나와 춤을 춘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상서로운 조짐이 나타났다고 여기고 더 즐기고 더 놀았다.

신라는 그 뒤로 기울었다. 넉넉한 시절로 시작한 조목이 이렇게 닫힌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같은 모양으로 올 수 있다는 것을 이 편은 두 번 보여 준다.

오늘, 물러난다는 것

처용의 이야기가 오래 남은 것은 그가 이긴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그는 그날 밤 아무것도 되찾지 못했다. 아내가 돌아왔다는 말도, 역신을 벌했다는 말도 기록에 없다.

그런데 상대가 무릎을 꿇었다. 이 대목이 사람마다 다르게 읽힌다. 맞설 수 없는 상대 앞에서 그가 고른 것이 가장 센 수였다고 볼 수 있다. 잃은 사람이 잃은 채로 남았을 뿐이라고 볼 수도 있다.

둘 다 이 이야기 안에 있다. 우리 일에서도 물러나는 자리가 온다. 화를 내면 상대와 같은 자리로 내려가고, 내지 않으면 무르게 보인다.

처용이 한 일은 참은 것과 조금 다르다.

그는 본 것을 그대로 말했다. 다리가 넷이라는 것과 둘은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것과 빼앗겼다는 것까지 노래로 말한 다음에 물러났다.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물러나면서 무엇을 말하고 물러나느냐가 그 뒤를 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