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파 압둘 말리크가 옛 이야기를 하나 들었다. 아주 오랜 옛날에 봉해진 놋쇠 병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안에 정령이 들어 있다고 했다.
4편에서 어부가 바다에서 건진 병이 그런 병이었다. 칼리파는 그런 병을 하나 보고 싶어 했다. 그는 무사 이븐 누사이르에게 그것을 찾아오게 했다.
길을 아는 사람으로 압둘 사마드라는 늙은이가 따라나섰다. 그는 옛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었다. 일행은 물을 싣고 사막으로 들어갔다.
사막에 서 있던 글씨
여러 날을 가는 동안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그 대신 만난 것이 있었다. 모래 위에 기둥이 서 있고 거기에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글씨는 여기에 누가 살았고 무엇을 가졌는지를 적어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들을 지켜 주지 못했다고 적혀 있었다. 읽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 마지막에 붙어 있었다. 지나가는 자여 우리를 보고 가라는 뜻의 말이었다.
더 가자 검은 성이 하나 나왔다. 성 안에도 사람은 없고 벽마다 같은 종류의 글이 있었다. 말을 걸어 오는 사람은 끝까지 없었다. 이 편에서 그들에게 말을 하는 것은 글씨뿐이다.
문이 없는 도시
사막 끝에서 성벽이 나타났다. 성벽은 높았고 놋쇠 빛이 났다. 일행은 벽을 따라 한 바퀴를 돌았다. 들어가는 문이 한 군데도 없었다.
들어가려면 벽을 넘는 수밖에 없었다. 사다리를 걸고 한 사람이 올라갔다. 그는 벽 위에 서더니 웃으면서 안쪽으로 뛰어내렸다.
같은 일이 되풀이되었다. 올라간 사람은 하나같이 벽 위에서 웃고 안으로 몸을 던졌다. 그렇게 열두 사람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이 벽 위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이야기는 적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압둘 사마드가 올라갔다. 그는 눈을 감고 자기가 외우던 말을 소리 내어 읊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뛰어내리지 않았다. 그는 안쪽 계단으로 내려가 성문을 안에서 열었다.
자기 자리에 그대로 있는 사람들
문이 열리자 도시가 그대로 있었다. 집이 서 있고 가게가 열려 있었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장사하던 사람은 저울 앞에 그대로 있었다. 가게 주인은 물건 사이에 앉은 채였다. 어느 집 안에는 상 앞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있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고 아무 데도 무너진 데가 없었다.
폐허라면 무엇이 있었는지 짐작해야 한다. 이 도시는 짐작할 것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그날 하던 일이 그대로 멈춘 채로 있었다. 그래서 이 도시는 무너진 도시보다 오래 마음에 남는다.
여왕이 누운 자리
도시 한가운데에 궁이 있었다. 그 안에 여왕이 누워 있었고 이름은 타드무르였다. 머리맡에 또 글씨가 있었다.
그 글은 자기가 무엇을 다스렸는지 적고 있었고, 그 무엇도 이 자리를 막지 못했다고 적고 있었다. 마지막 줄은 손을 뻗지 말라는 말이었다.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그 말을 읽고도 손을 뻗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넘어져 일어나지 못했다. 무사는 사람들을 물리고 그 방에서 나왔다.
나오면서 그가 챙긴 것은 재물이 아니었다. 그는 벽과 기둥의 글을 하나씩 베껴 적었다. 가지고 돌아갈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라고 보았다.
일행은 바닷가로 가서 어부들에게 병을 얻었다. 그물에 걸려 올라온 놋쇠 병이 여럿이었다. 칼리파가 보고 싶어 한 것이 그것이었다.
오늘, 남은 것이 글씨뿐일 때
이 편에는 이야기를 끌고 가는 사람이 없다. 말을 하는 것은 벽과 기둥과 머리맡의 글씨뿐이다. 그 글씨들이 하는 말은 하나로 모인다. 우리는 가졌고 그것이 우리를 지켜 주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편이 거기서 끝나지 않는 자리가 있다. 그 글을 다 읽고 들어간 사람들이 결국 손을 뻗었다. 읽는 일과 달라지는 일 사이에는 아무 다리가 없다. 남긴 쪽이 바란 것은 읽히는 것이 아니라 그다음이었을 것이다.
무사가 한 일이 그 사이에 놓인다. 그는 재물을 두고 글을 베껴 왔다. 그렇다고 그가 아무것도 잃지 않은 것은 아니다. 벽 위에서 돌아오지 않은 열두 사람을 두고 나온 것도 그다.
이 도시가 우리에게 하는 말은 그래서 두 겹이다. 가진 것은 남지 않는다는 말이 한 겹이다. 그 말을 읽고도 사람은 잘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 또 한 겹이다. 남긴 쪽은 그것까지 알고 남겼을지 모른다.
이제 이 책은 첫 편으로 돌아간다. 다음 편에서 천 밤을 이어 온 사람이 이야기를 멈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