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가 스승에게 묻는다. 어느 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모셔다 정치를 맡긴다면 무엇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돌아온 답은 다섯 글자였다.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
제자는 그 자리에서 받아친다. 선생님은 참 멀리 돌아가십니다. 그것을 어떻게 바로잡는다는 말입니까.
무엇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자로편 세 번째 장은 가정으로 시작한다. 위나라 임금이 스승을 모셔다 정치를 맡긴다면, 이라는 조건이 앞에 놓인다.
묻는 사람은 자로다. 자왈로 시작하지 않고 자로왈로 시작하는 장이라, 이 대화의 주도권이 처음부터 제자 쪽에 있다.
그가 고른 물음은 무엇이 옳으냐가 아니라 무엇이 먼저냐다. 자장하선(子將奚先), 선생님은 무엇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순서를 묻는 물음은 답하는 사람을 궁지로 몬다. 여러 개를 나열할 수 없고 하나를 골라야 하기 때문이다. 자로가 이 장의 주도권을 쥔 것도 그가 고른 물음의 모양에서 나온다.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
답은 짧다.
必也正名乎
필야정명호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 (자로 3)
다섯 글자다. 앞에 놓인 필(必)이 이 답의 성격을 정한다. 여럿 가운데 하나를 고른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것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정명(正名)은 낱말의 뜻을 사전처럼 정리한다는 말이 아니다. 임금이 임금답고 아버지가 아버지다워서 이름과 실제가 맞아떨어지게 한다는 쪽으로 읽힌다.
부르는 법을 고치는 일이 아니라 부르는 법과 실제 사이의 어긋남을 없애는 일이다.
선생님은 우원하십니다
여기서 이 장이 흔치 않아진다. 제자가 스승의 답을 그 자리에서 되받는다.
유시재(有是哉), 그러십니까. 자지우야(子之迂也), 선생님은 우원하십니다. 우(迂)는 멀리 돌아간다는 글자이고, 지금 쓰는 말로 옮기면 현실에서 떠 있다는 뜻에 가깝다.
그러고는 해기정(奚其正), 그것을 어떻게 바로잡는다는 말입니까 하고 덧붙인다.
『논어』에서 제자가 스승을 이렇게 정면으로 받는 자리는 많지 않다. 앞 부에서 뗏목을 타고 바다로 가겠다는 말에 기뻐했던 그 제자가 여기서는 반대쪽에 서 있다.
거칠구나, 유야
스승의 첫 반응은 반박이 아니라 꾸짖음이다. 야재유야(野哉由也), 거칠구나 유야.
그리고 곧바로 한 마디를 더 붙인다. 군자는 자기가 모르는 일에는 대개 비워 두는 법이라는 말이다.
이 한 마디는 답이 아니라 태도에 대한 지적이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두지 않고 곧바로 우원하다고 판정한 것을 짚은 셈이다.
그러고 나서야 설명이 시작된다.
여섯 고리로 이어진 문장
설명은 논증이 아니라 사슬의 모양을 하고 있다.
名不正則言不順 言不順則事不成
명부정즉언불순 언불순즉사불성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않고, 말이 순조롭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로 3)
여기서 멈추지 않고 같은 모양이 네 번 더 이어진다.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일어나지 않고, 예악이 일어나지 않으면 형벌이 들어맞지 않고, 형벌이 들어맞지 않으면 백성이 손발을 둘 데가 없어진다.
예악(禮樂)은 오늘의 예절이나 공연이 아니라 나라의 의례 제도 전체를 가리킨다.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가 정해져 있는 공적인 틀이라, 말과 형벌 사이에 놓일 자리가 여기다.
한 칸씩 보면 각 고리는 그리 무리한 연결이 아니다. 다만 이런 사슬은 칸이 늘어날수록 처음과 끝의 거리가 멀어지고, 그 거리를 두고 사람마다 다르게 읽는다.
손발을 둘 데가 없어진다
마지막 칸에 놓인 말이 무소조수족(無所措手足)이다.
손과 발을 둘 데가 없다는 다섯 자인데, 이 문장이 나라의 위기를 창고나 군대로 그리지 않고 몸의 자세로 그린다는 점이 눈에 띈다.
무엇을 하면 벌을 받고 무엇을 하면 안전한지 알 수 없을 때 사람은 움직이는 법을 잃는다. 서 있는 자세부터 어색해지는 상태다.
앞의 다섯 칸이 제도의 언어로 쓰였다면 마지막 칸만 사람의 몸으로 쓰였다. 사슬이 끝나는 자리에 백성 개인이 놓여 있는 셈이다.
위나라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
이 문답을 비유로만 읽으면 절반이 빠진다. 물음에 위나라라는 이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좌전은 그 무렵 위나라에 아버지와 아들이 임금 자리를 두고 맞선 일이 있었다고 전한다. 아버지는 앞서 나라 밖으로 망명해 있었고, 그 사이에 아들이 임금 자리에 앉았다. 아버지가 돌아오려 하자 아들이 막았다.
그러면 그 아들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임금이라 부르면 아버지를 막은 일이 정당해지고, 아들이라 부르면 그가 앉은 자리가 흔들린다.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이름이 한 사람 위에서 부딪히고 있었던 셈이다.
다만 이 문답이 그 일을 가리킨다고 원문이 적어 둔 것은 아니다. 두 기록을 잇는 것은 공자가 위나라에 머문 시기를 근거로 한 오래된 읽기이고, 이 편도 그 읽기를 따랐다. 그 읽기를 따르면 자로가 우원하다고 한 답이 사실은 그 나라의 한가운데를 가리키고 있었던 셈이 된다.
오늘, 이름이 어긋난 자리
말부터 고치자는 제안은 대개 한가한 소리로 들린다. 급한 일이 따로 있는데 표현을 만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이 장이 내놓는 반론은 내용이 아니라 순서다. 무엇을 무엇이라 부를지가 정해지지 않으면 그 뒤에 오는 것들이 차례로 어긋난다는 것이다.
같은 회의에 앉아 같은 낱말을 쓰면서 서로 다른 것을 가리키고 있었던 경험은 대체로 있다. 그 회의에서 나온 결정은 실행 단계에서 갈라지고, 그 결정으로 만든 규칙은 엉뚱한 사람에게 적용된다.
다만 이름을 바로잡는 일에는 늘 따라붙는 물음이 하나 있다. 무엇이 올바른 이름인지를 누가 정하느냐는 물음이다.
이 장은 그 물음까지는 가지 않는다. 여기서 밝혀 둔 것은 이름이 어긋난 채로는 그 뒤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순서까지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아직 무엇이라 부를지 정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