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범이 기다린 숲

닿다 3,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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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두 편은 사람이 사람에게 닿는 이야기였다. 이번 편에는 사람이 아닌 쪽이 나온다.

탑을 돌다 만난 처녀가 범이었고, 그 범이 자기를 죽여 달라고 부탁한다.

이 편은 그 부탁을 들어준 사람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가 평생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이야기다.

탑을 돌던 밤

신라의 풍속에 해마다 이월이면 복회가 있었다. 여드레부터 보름까지 서울의 남녀가 흥륜사의 전탑을 돌았다. 복을 빈다는 뜻이었다.

원성왕 때 김현이라는 총각이 있었다.

그는 밤이 깊도록 혼자 탑을 돌았다. 한 처녀가 염불을 하며 뒤를 따라 돌았고, 둘은 도는 동안 서로 마음이 통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처녀가 돌아가려 하자 김현이 따라나섰다. 처녀는 사양했으나 그는 굳이 따라갔다.

산기슭의 집

서산 기슭의 초막에 이르렀다. 늙은 할미가 나와 함께 온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처녀가 사실대로 말했다.

할미의 대답이 이 편의 첫 번째 갈림이다.

좋은 일이기는 하나 없느니만 못하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저지른 일이니 나무랄 수 없다고 했다. 그러고는 네 형제들이 알까 두려우니 숨기라고 했다.

처녀가 김현을 구석에 숨겼다.

조금 뒤에 범 셋이 으르렁거리며 들어왔다. 집에서 사람 냄새가 나니 요기하기 좋겠다고 사람의 말로 말했다.

할미와 처녀가 꾸짖어 물리쳤다.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 너희가 남의 목숨 빼앗기를 좋아하니 마땅히 하나를 죽여 악을 징계하겠다는 말이었다.

세 짐승이 그 소리를 듣고 근심에 빠졌다.

처녀가 말했다. 세 오빠가 멀리 피해 스스로 뉘우치겠다면 그 벌을 자기가 대신 받겠다고 했다.

셋은 기뻐하며 달아났다.

다섯 가지 이로움

처녀가 들어와 김현에게 말했다. 처음에는 집에 오시는 것이 부끄러워 사양했으나 이제는 숨길 것이 없다고 했다.

그다음에 말한 것이 자기 계획이다.

내일 자기가 저잣거리에 들어가 사람을 크게 해치겠다고 했다. 나라 사람들이 어쩌지 못할 것이고 왕이 반드시 높은 벼슬로 사람을 모을 것이라 하며, 그때 겁내지 말고 성 북쪽 숲으로 쫓아오면 자기가 기다리겠다고 했다.

남의 손에 죽느니 낭군의 칼에 죽어 은혜를 갚겠다는 것이었다.

김현이 물리쳤다. 사람이 다른 무리와 사귀는 것은 떳떳한 일이 아니라고 그는 먼저 말했으나, 이미 잘 지냈으니 하늘이 준 다행이라고 했다.

어찌 배필의 죽음을 팔아 요행으로 벼슬을 바라겠느냐고 했다.

처녀가 그 말을 받았다. 그러고는 이 일에 이로움이 다섯 가지라고 세어 보였다.

자기가 일찍 죽는 것은 하늘의 명이고 또 자기의 소원이라고 했다. 낭군의 경사이고 제 일족의 복이며 나라 사람들의 기쁨이라고 했다. 한 번 죽어 다섯이 갖추어지는데 어찌 어기겠느냐고 했다.

다만 자기를 위해 절을 세우고 경을 읽어 달라고 했다.

두 사람은 울면서 헤어졌다.

숲에서

이튿날 사나운 범 한 마리가 성 안에 들어왔다. 사람을 많이 상하게 했고 아무도 감당하지 못했다.

원성왕이 듣고 명을 내렸다. 그 범을 잡는 자에게 이급의 벼슬을 주겠다고 했다.

김현이 대궐에 나아가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아뢰었다.

왕은 벼슬을 먼저 주어 그를 격려했다. 이 순서를 기록은 그대로 적어 둔다.

김현이 칼을 쥐고 숲으로 들어갔다.

범이 낭자로 바뀌어 웃으며 그를 맞았다. 어젯밤의 일을 잊지 말라고 했다. 오늘 자기 발톱에 상한 사람들은 흥륜사의 간장을 바르면 된다고 했다. 그 절의 나발 소리를 들으면 나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김현이 찬 칼을 뽑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현이 숲에서 나왔다. 범을 쉽게 잡았다고만 말하고 그 사유는 숨겼다.

일러 준 방법대로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니 상처가 다 나았다. 지금도 그 방법을 쓴다고 일연은 적어 둔다.

김현은 벼슬한 뒤 서천 가에 절을 세워 호원사라 했다. 늘 경을 강해 범의 뒷길을 인도하고 은혜를 갚았다.

그가 그 일을 글로 적은 것은 죽을 때가 되어서다.

세상이 그제야 알았다. 그 글의 이름을 논호림이라 한다.

일연은 이 조목 뒤에 중국의 비슷한 이야기를 하나 붙여 두었다. 범이 사람의 아내가 되었다가 떠나는 이야기다. 그쪽 범은 사람을 견디지 못해 시 한 수를 남기고 산으로 돌아간다.

두 이야기를 나란히 놓고 일연은 이쪽 범을 더 높이 본다. 부득이 사람을 상하게 했으나 사람을 살리는 방법을 알려 주고 갔다는 것이다.

일연이 붙인 넉 줄

이 조목의 끝에 일연이 넉 줄을 붙여 두었다. 우리말로 옮긴다.

산속의 집이 세 오빠의 악을 견디지 못하니 난초 같은 입이 꽃다운 말을 토해 한 번 허락함이 간곡했다 의리가 여러 가지로 무거워 만 번 죽음을 가벼이 여기고 숲 아래 몸을 던지니 지는 꽃이 어지러웠다

넉 줄이 짚는 것은 처녀 쪽뿐이다. 김현은 이 안에 없다.

오늘, 그가 말하지 않은 것

이 편에서 가장 이상한 자리는 범이 사람으로 바뀐 대목이 아니다.

김현이 한 말과 그가 한 일 사이다.

그는 배필의 죽음을 팔아 벼슬을 바라지 않겠다고 했다. 다음 날 그는 대궐에 나아갔고 왕은 벼슬을 먼저 주었다.

그가 거절한 것과 그가 받은 것이 같은 것이다.

기록은 이 어긋남을 지우지 않는다. 순서를 그대로 두고 아무 말도 붙이지 않는다.

읽는 쪽에서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그가 그 사람의 뜻을 따랐다는 쪽이다. 다섯 가지 이로움을 세어 보인 것은 그 사람 자신이다. 남이 스스로 정한 일을 그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막는 것은 존중이 아니다.

게다가 벼슬을 받지 않았다면 그는 숲에 들어갈 자격도 없었다.

다른 하나는 말과 한 일이 갈렸다는 쪽이다. 그는 숲에서 나와 쉽게 잡았다고만 했고 사유를 숨겼다.

숨긴다는 것은 어딘가에 걸리는 데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는 평생 말하지 않았다. 절을 세우고 경을 읽으며 살았지만 그 일을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붓을 들었다.

여기서 물을 것이 하나 더 생긴다. 그 글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나.

간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면 늦었다. 남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면 그는 무엇을 알리고 싶었을까.

혹은 자기를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우리도 거절해 놓고 결국 그대로 하게 되는 자리를 만난다. 그럴 때 대개 사람은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조용해진다.

김현은 벼슬을 살고 절을 세우는 동안 내내 조용했다.

이 편이 남긴 것은 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