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편에는 나무 한 그루가 나온다. 왕이 될 사람과 신하가 그 아래에서 바둑을 두었다.
그 자리에서 한 말이 있었다. 훗날 그대를 잊는다면 저 나무가 증거가 될 것이라고 했다.
몇 달 뒤에 그는 그를 잊었고, 나무가 시들었다.
잣나무 아래의 약속
효성왕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이었다.
그는 어진 선비 신충과 궁정의 잣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곤 했다.
어느 날 그가 말했다. 훗날 만약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거가 될 것이라고 했다.
신충이 일어나 절했다.
약속에 나무를 세운 것이 이 편에서 눈여겨볼 첫 자리다. 사람의 기억이 아니라 밖에 있는 것을 증인으로 삼았다.
차례에서 빠지다
몇 달이 지나 그가 왕위에 올랐다.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상을 주었다. 그 차례에 신충이 없었다.
기록은 왕이 미워했다고 적지 않는다. 잊었다고 적는다.
신충이 원망했다.
그는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였다. 그러자 나무가 누렇게 시들었다고 기록은 적는다.
이 노래는 향찰로 남았다.
지금은 그것을 소리 나는 대로 읽지 못하고 읽어 낸 결과도 갈려서, 여기서는 노래를 옮기지 않고 무엇을 말했는지만 적는다.
가을이 되어도 시들지 않는 잣나무 같겠다던 그 얼굴이 변할 줄 몰랐다고 한다.
그리고 못에 비친 달그림자를 두고 원망한다. 세상 모든 일이 다 멀어졌다는 데서 노래가 끝난다.
나무가 다시 푸르러지다
왕이 나무가 시든 것을 이상히 여겼다.
사람을 시켜 살펴보게 하니 붙어 있던 노래를 얻어 왔다.
왕이 크게 놀랐다.
나랏일에 바빠 하마터면 가까운 사람을 잊을 뻔했다고 했다. 그러고는 신충을 불러 벼슬을 주었다.
그러자 잣나무가 다시 살아났다.
이 뒤로 신충은 두 임금에게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여기까지가 이 조목의 앞쪽이다. 나무 한 그루가 잊힌 약속을 말한 셈이다.
스스로 걸어 둔 갓
경덕왕 스물두째 해의 일이다.
신충이 두 벗과 서로 약속하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남쪽 산으로 들어갔다. 왕이 두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그는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왕을 위해 절을 하나 세우고 거기 살았다. 평생 골짜기에 숨어 왕의 복을 빌겠다고 하니 왕이 허락했다.
갓을 걸어 둔다는 말이 벼슬을 그만두는 일을 가리킨다.
이 사람은 자리를 두 번 정했다. 한 번은 잊힌 것을 일깨워 받았고, 한 번은 아무도 뺏지 않은 것을 스스로 놓았다.
일연이 붙인 넉 줄
신충의 조목에도 넉 줄이 붙어 있다. 우리말로 옮겨 본다.
공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귀밑머리가 먼저 세었고 임금의 사랑이 많아도 한평생이 바쁘기만 하다 건너편 언덕의 산이 자꾸 꿈에 들어오니 가서 향불을 사르며 우리 임금을 위해 빌겠다
벼슬을 버린 쪽에 무게를 실었다. 시든 나무는 넉 줄에 들어 있지 않다.
오늘, 일깨워서 받은 것
이 편은 6부에서 앞뒤가 뒤집힌 자리에 있다.
앞 편의 승려는 자리를 피해 달아났다가 돌아와 받았다. 이 편의 신하는 받아야 할 것을 못 받아 말했고, 받은 뒤에 스스로 놓았다.
우리 쪽에서 익숙한 것은 뒤쪽이 아니라 앞쪽이다.
약속한 사람이 잊었을 때 그것을 말하는 일 말이다.
말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분명하다. 말하면 받을 수는 있지만, 받은 것이 약속인지 조른 결과인지 흐려진다.
말하지 않으면 마음만 상한 채로 남는다.
신충은 말하는 쪽을 골랐다. 다만 곧바로 따지지 않고 노래로 했고, 그것을 사람에게 주지 않고 나무에 붙였다.
그러면 그렇게 받은 것은 약속이 지켜진 것인가.
지켜졌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은 잊고, 잊은 쪽에게 알리는 일까지가 약속을 살리는 일이다. 왕은 곧바로 고쳤다.
이미 깨졌다고도 볼 수 있다.
왕이 나무를 세운 것은 잊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일깨워야 하는 약속이라면 그 대목에서 끝난 것이고, 신충이 받은 것은 벼슬이지 약속이 아니다.
기록은 나무로 그 물음을 남겨 두었다.
나무는 잊혔을 때 시들었고 고쳤을 때 살아났다. 무엇을 증거로 삼을지는 그것을 보는 사람이 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