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너는 그릇이다

제자 5, 자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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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스승에게 대놓고 물은 제자가 있다.

돌아온 답은 그릇이라는 한 낱말이었고, 그는 어떤 그릇이냐고 한 번 더 물어야 했다.

같은 사람이 다른 자리에서는 이제야 함께 시를 말할 만하다는 말을 들었다. 이 편은 한 사람이 받은 두 평가를 나란히 놓고 본다.

저는 어떻습니까

공야장편 세 번째 장이다. 앞 편들과 달리 이번에는 묻는 쪽이 제자다.

자공이 스승 앞에 서서 자기를 어떻게 보시느냐고 청한다. 남에 대한 평을 구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를 구한 자리라, 이 책에서 자주 나오는 모양은 아니다.

賜也何如 女器也 何器也 瑚璉也

사야하여 여기야 하기야 호련야

사는 어떻습니까. 너는 그릇이다. 어떤 그릇입니까. 호련이다. (공야장 3)

열세 글자 안에 네 마디가 들어 있다. 묻고 답하고 다시 묻고 다시 답하는 동안 스승은 한 번도 문장을 늘리지 않았다.

그릇이라는 답

너는 그릇이다. 원문으로는 여기야(女器也) 석 자다.

여기서 여(女)는 여자가 아니라 너라는 뜻으로, 여(汝)와 같은 글자로 쓰인다. 제자를 앞에 세워 놓고 부르는 말이다.

답이 짧아서 자공은 그 말이 좋은 말인지 아닌지를 그 자리에서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릇이라는 낱말만으로는 크다는 것인지 작다는 것인지, 귀하다는 것인지 흔하다는 것인지가 갈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한 번 더 묻는다. 어떤 그릇입니까.

호련이라는 이름

호련(瑚璉)은 두 글자짜리 이름이다.

종묘의 제사에서 곡식을 담는 제기이고, 옥으로 꾸며 두었으며 아무 자리에나 내놓지 않는 물건이었다. 그릇을 늘어놓고 등급을 매긴다면 맨 위에 놓일 물건이다.

그러니 이 답은 분명히 높은 평가다.

다만 제기에는 다른 성질도 하나 있다. 종묘가 아닌 자리에서는 쓸 데가 없다는 것이다. 밥을 담을 수도 물을 길을 수도 없고, 제사가 아닌 날에는 그저 보관되어 있을 뿐이다.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위정편에는 군자불기(君子不器) 넉 자가 있다. (위정 12) 군자는 그릇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넉 자를 옆에 놓으면 공야장편의 답이 다르게 들린다. 그릇이 아니어야 한다고 말한 스승이 한 제자를 그릇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주자는 호련을 그릇 가운데 귀한 것으로 보면서도 자공이 아직 불기의 자리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보았다.

칭찬으로 읽으면 스승이 제자에게 최고 등급을 매긴 장면이 되고, 한계로 읽으면 네가 어디까지 왔는지를 함께 알려 준 장면이 된다. 어느 쪽인지는 이 짧은 문답 안에 적혀 있지 않다.

가난하되 아첨하지 않고

같은 사람이 다른 자리에서는 다른 말을 듣는다. 학이편 열다섯 번째 장이다.

이번에도 자공이 먼저 묻는다.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해도 교만하지 않으면 어떻겠습니까.

빈이무첨 부이무교(貧而無諂 富而無驕), 여덟 글자다. 자기가 지키고 있는 것을 내놓고 이 정도면 되겠느냐고 물은 셈이라, 물음의 모양이 앞의 장면과 닮아 있다.

공자는 괜찮다고 했다. 그러고는 말을 잇는다.

그것만은 못하다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미약빈이락 부이호례자야

가난하되 즐기고 부유하되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 (학이 15)

열한 글자로 기준이 옮겨 간다.

자공이 내놓은 것은 하지 않음의 목록이었다. 아첨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는다.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쪽의 말이다.

스승이 더 위에 놓은 것은 하는 쪽이다. 가난한 자리에서 즐거워하고 부유한 자리에서 예를 좋아하려면, 그 처지를 견디는 데 쓰던 힘이 남아서 다른 데로 흘러가야 한다.

없음을 지키는 일과 있음을 만드는 일은 힘이 드는 자리가 서로 다르다.

이제야 시를 말할 만하다

자공은 그 답을 듣고 물러서지 않았다. 시경 한 구절을 끌어온다.

여절여차 여탁여마(如切如磋 如琢如磨), 여덟 글자다. 자르는 듯하고 가는 듯하며 쪼는 듯하고 문지르는 듯하다는 말로, 원래는 옥과 뼈를 다듬는 공정을 이르던 구절이다.

이미 좋은 재료를 한 번 더 다듬는다는 뜻이니, 아첨하지 않는 데서 즐기는 데로 옮겨 가는 일이 바로 그 다듬기라는 읽기가 된다.

공자의 반응이 이 장면의 끝이다. 사(賜)야, 이제야 너와 함께 시를 말할 만하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인다. 고저왕이지래자(告諸往而知來者), 일곱 글자다. 지나간 것을 일러 주면 올 것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오늘, 어떤 그릇으로 불리는가

일 잘한다는 말을 오래 들은 사람은 어느 날 그 말이 좁아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일을 잘한다는 뜻으로 굳어 있고, 다른 자리로 옮기려 하면 아까워하는 사람이 생긴다.

호련이라는 답에는 그 이중이 그대로 들어 있다. 귀하다는 말과 자리가 정해져 있다는 말이 한 낱말 안에 겹쳐 있다.

자공이 그 답을 듣고 무엇을 했는지는 기록에 없다. 다만 학이편의 장면에서 그는 스승의 답을 받아 시 한 구절로 되받았고, 그때는 그릇이라는 말 대신 함께 말할 만하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요즘 어떤 그릇으로 불리고 있으며, 그 이름이 나에게 붙어 있는 것이 다행인가 아쉬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