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이 제자에게 다른 제자와 견주어 보라고 묻는 장면은 흔하지 않다.
『논어』에는 그런 장면이 하나 있다. 묻는 쪽이 공자이고 받는 쪽이 자공이다.
이 편부터 제자들을 하나씩 본다. 첫 사람은 스승이 가장 아꼈고 가장 먼저 잃은 제자다.
스승이 먼저 물었다
공야장편 여덟 번째 장이다. 공자가 자공을 불러 놓고 묻는다. 너와 회 가운데 누가 나으냐.
지금 기준으로 보면 곤란한 물음이다. 두 사람을 나란히 세워 놓고 한 사람에게 답하라고 한 셈이기 때문이다.
자공의 답은 물러서는 쪽이었다.
回也聞一以知十 賜也聞一以知二
회야문일이지십 사야문일이지이
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사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압니다. (공야장 8)
사(賜)는 자공의 이름이다. 스승 앞에서 자기를 가리킬 때는 자가 아니라 이름을 쓴다.
열과 둘
숫자가 눈에 띈다. 조금 못하다고 하지 않고 열과 둘로 갈랐다.
다섯이라고 했으면 겸손이 되었을 것이다. 둘이라고 하면 다른 종류의 말이 된다. 따라잡을 수 있는 거리가 아니라고 스스로 정해 버린 것이다.
자공은 말이 빠르고 판단이 빠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답했다는 사실이 이 장면의 무게를 만든다.
마지막 한마디
문제는 공자의 반응이다.
오여여불여야(吾與女弗如也), 여섯 글자다. 이 자리에서 읽기가 갈린다.
여(與)를 그리고로 읽으면 나와 너 둘 다 그만 못하다가 된다. 스승이 자기를 제자 옆에 나란히 놓고 함께 못 미친다고 말한 셈이다.
주자는 다르게 읽었다. 여(與)를 허여한다, 인정한다는 뜻으로 보아 네가 그만 못하다는 그 말을 내가 인정한다로 풀었다.
앞쪽으로 읽으면 위로가 되고 뒤쪽으로 읽으면 확인이 된다. 한 글자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스승의 얼굴이 통째로 달라진다.
이 시리즈는 이런 자리에서 하나를 골라 주지 않고 갈린다는 사실을 함께 적는다.
배우기를 좋아한다는 말
안회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다른 자리에 더 분명히 나온다. 노나라 임금 애공이 제자 가운데 누가 배우기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때다.
공자는 안회를 들었다. 그리고 그 이유로 든 것이 뜻밖이다.
不遷怒 不貳過
불천노 불이과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잘못을 두 번 하지 않았습니다. (옹야 2)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하지 않았다. 기억이 좋다고도, 묻기를 잘한다고도 하지 않았다.
배우기를 좋아한다는 말의 내용으로 나온 것이 아는 양이 아니라 이 둘이다.
노여움을 옮기지 않는다
앞의 석 자가 어려운 쪽이다. 옮긴다는 것은 화가 난 자리와 상관없는 사람에게 그 화를 쏟는 일이다.
밖에서 상한 마음을 집에 와서 푸는 일, 윗사람에게 눌린 것을 아랫사람에게 흘리는 일이 전부 여기에 든다. 화를 안 내는 것이 아니라 화를 제자리에 두는 것이다.
이것이 왜 배움과 이어지는지는 조금 생각해 볼 만하다. 노여움을 옮기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에 화가 났는지를 정확히 보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잘못을 두 번 하지 않는다
뒤의 석 자는 더 단순해 보이는데 실제로는 더 어렵다.
잘못을 안 하는 것이 아니다.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려면 무엇을 잘못했는지 자기가 알고 있어야 한다.
앞 부에서 본 문장 하나가 여기에 걸린다.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이 앎이라던 그 말이다. 자기 잘못의 경계를 아는 사람만 그것을 두 번 하지 않을 수 있다.
지금은 없다
애공에게 한 답에는 뒷말이 붙어 있다. 안회는 명이 짧아 죽었고 지금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를 아직 듣지 못했다고 했다.
제자가 삼천이었다고 전해지는 사람의 말이다. 그 가운데 배우기를 좋아한 사람이 하나였고, 그 하나가 먼저 갔다는 뜻이 된다.
이 시리즈의 마지막 부에서 그 죽음을 따로 다룬다. 여기서는 이 말이 이미 죽은 사람을 두고 한 말이라는 것만 적어 둔다.
오늘, 견주고 난 다음
남과 자기를 견주는 일을 우리는 대체로 나쁜 것으로 배운다. 그런데 견주지 않으면 자기가 어디까지 왔는지 알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 장면에서 눈여겨볼 것은 자공이 견준 다음에 한 일이다. 그는 그 자리에서 그만두지 않았다.
앞 부에서 본 답들 가운데 여럿이 그의 물음에서 나왔다. 평생 지고 갈 한마디도, 어짊의 크기에 관한 답도 그가 물어서 나온 것이다.
견주는 일 자체가 아니라 견준 다음에 무엇을 하는지가 갈림길인지도 모른다.
나는 최근에 누군가와 나를 견주었고, 그러고 나서 무엇을 했는가.